생진, 문과, 명현. 청백리, 풍천(豊川)인.
자는 자응(子膺), 호는 칙암(則庵), 학자로는 옥계(玉溪)선생이라 칭한다. 졸존재(拙存齋) 교리 분(昐)의 손자. 우명(友明)의 둘째 아들이며, 중종 32년(1537) 진사를 하고 명종 원년(1546) 문과에 등제하여 학문과 효행이 세상에 추중한 바 되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피선되었다.
문효(文孝)의 시호(諡號)가 내렸고 선조 8년 정유(1577)에 효로서 명정되었으며, 동 12년 기묘(1579)에 남원 고룡서원(古龍書院), 동 경자(1600)에 창주(滄州)로 사액(賜額)에 향하고, 동 18년 신사(1581)에 당주(溏州)서원에 배향하다. 고종 15년 무인(1878)에 양원이 훼철되었는데 당주서원은 그 옛터에 유허비만 섰고 창주서원은 광복 후 1959년 남원시 도통리에 복설(復設)하였다.
지곡면 개평에 살았다. 서울 우사(寓舍)에서 돌아가심에 임금이 삼일간 조례를 철하시고 예조좌랑 강신(姜神)을 보내 사문치제하다. 정려가 지곡면 창촌 동편에 있었는데 개평리 오평마을로 이건하였다.
석갈(釋褐, 벼슬살이) 30여 년에 정부에 나아간 날은 3년이 지나지 않은 것은 노모 봉양을 위함이요 판서가 되어도 서울에 집 한 칸 없고 고향에 밭 한 이랑이 없으며, 함양으로 반장(返葬)할 때 고을 사민들이 다 모였고 참여치 못한 자는 집에서 위패를 쓰고 통곡하였다.
참고
「함양군사(咸陽郡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