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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라시대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학자, 문장가. 경주(慶州)인으로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나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였다.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율수현(溧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회남절도사 고병(高騈)의 종사관으로 나가 「격황소서(檄黃巢書)」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 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 벼슬을 받았다. 하지만 왕실 귀족들의 경계와 질시로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대산군(大山郡)(전라북도 정읍시), 천령군(天嶺郡)(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富城郡)(충청남도 서산시) 태수 등 외직을 전전하였다. 진성여왕 8년(894) 임금에게 「시무 10조(時務十條)」를 올려 아찬 관직을 받았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개혁이 무산되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익힌 학술과 식견을 바탕으로 큰 뜻을 펼치려 했으나 좌절되자,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천을 노닐며 책 읽고 시 짓는 일로 소일하였다. 부산의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字)를 따서 ‘海雲臺’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해운대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계원필경」과 「법장 화상전」, 「사산비명」의 내용만이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받았고, 국자감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부산 동래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


참고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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