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휴천면> 남호리> 충묘비(忠猫碑)
원기마을에 있던 옛날 신라시대의 엄천사에 얽힌 이야기로서 절터에서 유림으로 나가는 약 1km정도 되는 벼리는 옛날부터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천길만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깎아 세운 듯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이 아니고서는 드나들 수 없는 험준한 절벽의 연속이다.
그래서 유림면이나 산청방면으로 가려고 하면 금서면 자혜마을로 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배를 타고 지곡마을로 건너와 일을 봐야 했다. 그리고 목현이나 함양방면으로 볼일이 있을 때는 엄천사 뒤의 험한 당재를 넘어서 오고가곤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빙빙 둘러다녀야 했으니 엄천은 교통이 불편하고 별유천지처럼 되어있었던 것이다.
겨울이 오면 눈으로 뒤덮인 절벽은 아름답게 되어 일대 장관을 이루지만 사람들은 집안에 꼼짝도 못하고 갇혀있어 위급한 일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애를 태워야 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외진 곳 엄천사의 종소리와 목탁소리는 이 쓸쓸한 골짜기에 더욱 처량하게 들려만 왔다.
그런데 엄천사에는 늙어빠진 고양이 한 마리가 스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법당을 지키고 있어 쥐들이 꼼짝도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밤에 전국적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엄천사는 폭설로 뒤덮여 쓸쓸하고 적막하였다. 이 때 늙은 고양이는 자기를 가장 아껴주던 주지스님의 장삼을 물고 질질 끌면서 벼리 쪽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장삼 끌린 길을 따라 벼리 쪽으로 가자 장삼을 끌고 간 쪽에는 길이 나있고 고양이는 장삼을 끌고 수없이 벼리를 오고가서 사람도 할 수 없는 새로운 길을 뚫어내었던 것이다.
새 길을 내기 위하여 늙은 고양이는 주지스님의 장삼을 수없이 끌고 다녀 결국 장삼은 달아 문드러져버리고 고양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앙상한 몸으로 지쳐서 죽고 말았다. 엄천사 계곡에서는 뜻하지 않은 새 길을 내었기 때문에 엄천사 승려들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말은 언비천리(言飛千里)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많은 승려들과 주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신산기묘(神算奇妙)한 고양이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바라보았다. 이 고양이의 죽음은 하늘이 아는 죽음이요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하여 보낸 천사와 같은 죽음이라고 승려들은 생각하였다. 한낱 고양이의 죽음이지만 엄천사 승려들에게는 크나큰 공을 세우고 교훈을 주는 귀중한 죽음이었다.
고양이가 죽은 자리에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다 낡아빠진 장삼도 같이 묻어서 덮어주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왔다 갔다 한 바위 사이에는 구멍을 뚫고 나무를 걸쳐 잔도교(棧道橋)를 가설하면서부터 가깝고 다니기 쉬운 곳으로 가로질러 벼랑길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의 무덤이 있는 엄천골과 유림면의 경계선에 충묘비를 세워서 그 넋을 길이길이 빛내고자 하였다.
조선 성종 20년(1489) 음력 4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이곳을 지나면서 엄천사에서 동쪽으로 일리에 뻗친 벼랑의 바윗길인데 사람들이 돌을 깎아 구멍을 내어 다닐 수 있게 했다는 기록이 속두류록에 남아있다. 그리고 옛날에 있었던 충묘비는 현재는 도로를 새로 내면서 간 곳이 없고 고양이 무덤과 장삼의 무덤은 지리산 국립공원 관광도로변에 남아있다.(남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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