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하면> 봉전리> 황석산성 피바위
1597년 정유왜란이 재차 일어났다. 왜군은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이 황석산 아래를 지나가야 하였다. 그러므로 산성을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군은 이만칠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 성을 삼일간이나 공격하였다. 황석산성의 수비는 빈틈없이 견고하였다. 일당백의 대치에서 돌을 운반하여 석전과 화살 죽창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다 동원되었다.
왜군은 성이 견고하자 더욱 마음이 초조해져서 8월 17일 새벽 일제히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왜군이 성 아래 새까맣게 몰려오자 김해부사 백사림이 출전장으로서 황석산성에 와 있다가 이 광경을 보고 적의 공격이 두려워 전의를 잃고 가족을 거느리고 북문을 열어 도망가고 말았다. 그 열린 문으로 왜군이 물밀듯이 몰려 들어와 성안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다.
성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백병전이 벌어졌다. 살육의 현장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사림의 비열한 행동이 없었던들 왜적은 산성 함락을 포기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산성을 피로 물들인 한 맺힌 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성안에 와서 군사들을 돕던 많은 부녀자들은 이제 왜군에게 치욕을 당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 중에 옥녀라는 젊은 부인이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남편은 의병으로 출전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옥녀는 사랑하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이 황석산성에 들어온 것이다.
성안에서 살육전이 벌어지자 관민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옥녀도 죽기 전에 남편의 원수인 왜병을 하나라도 더 없애고 죽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성내는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가오는 왜병을 손에 든 부엌칼로 가슴을 향해 힘껏 찔렀다. 여자라고 방심했던 왜병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른 부녀자들도 돌을 던지고 낫으로 치고 혹은 몽둥이 죽창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들고 적에게 맞섰다.
옥녀는 남편의 원수를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놈이라도 더 많은 왜병을 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왜병 한 놈이 쓰러지자 이 모습을 본 다른 놈이 칼을 빼어들고 이리로 달려왔다. 잔인한 왜적들은 부녀자라고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왜적에게 찔려 죽거나 치욕을 당하거나 이를 면할 길이 없었다. 수치를 당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왜병이 가까이 오기 전에 남쪽 성벽으로 달려가서 벼랑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선혈로 벼랑을 붉게 물들이니 이를 지켜보던 다른 부녀자들도 우리가 살아남아 어찌 왜적들에게 치욕을 당하랴 하고 뒤따라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한 두 사람도 아닌 수많은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뛰어내렸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많은 부녀자들이 뛰어내려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여인들의 한이 스며들어 사백여 년이 지난 오늘도 벼랑 아래 너럭바위의 핏자국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울적한다. 비 올 때만 되면 이 바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처절하게 피로 물든 바위를 후세 사람들은 '피바위'라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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